【 번조증 - 손발바닥의 열 】
● 관련상식
▶ 수족냉증
다음은 몇 해전 겨울 한의원을 찾은 ‘맨발의 신사’ 할아버지 이야기이다.
70세 가량의 할아버지께서 진료실에 들어섰는데, 말끔한 정장에 코트를 걸친 노신사의 슬리퍼 속 발은 맨발이었다. ‘이 무슨 조화인가?’라며 의아해하는 내 속을 알아차렸는지, 대뜸 ‘원장님, 발바닥이 뜨거워 죽겄소’라고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추운 날도 양말을 신으면 답답하니 외출하기가 겁나고, 잠잘 때도 이불을 차내다가 마누라에게 구박 당하다 못해 이젠 아예 이불 밖으로 쫓겨났소.라며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한의원에서 ‘맨발의 신사’로 통하고 있다.
▶ 수족번열증이란?
요즘도 그 ‘맨발의 신사’ 할아버지처럼 발바닥 또는 손바닥이 뜨거워서 한의원을 찾는 환자가 많습니다. 이렇게 손발바닥이 달아오르는 증상을 ‘수족번열(手足煩熱)’이라고 하며, 양손과 양발바닥에 가슴까지 포함하여 우리 몸의 다섯 가지 중심이 번열(煩熱)이 생기는 것을 한방에서는 ‘오심번열(五心煩熱)’이라고 합니다.
수족번열증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증상이지만, 임상에서 노인들에게서 아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갱년기 여성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데, 흔히 손발바닥 뿐만 아니라 가슴이 답답하고 얼굴도 화끈화끈 달아오른다고 호소하죠. 그 외 중병을 앓은 후나 분만 때 피를 많이 흘린 경우나 신경이 예민한 사람, 다혈질인 사람들이 오심번열증이 잘 생깁니다.
갑상선기능항진증에 걸려도 손발이 뜨거울 수 있습니다. 이 병에 걸리면 인체 신진대사가 비정상적으로 왕성해져 손발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워 더위를 견디지 못합니다. 몸에 열이 나면서, 눈이 돌출 되고, 목이 붓고, 자꾸 배가 고파 밥을 많이 먹어도 살이 빠지는 증상이 있다면 갑상선기능항진증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때는 병원에서 검사를 한 후 갑상선치료를 받도록 합니다.
▶ 수족번열증은 왜 생기나?
우리 몸의 체온을 조절하는 자율신경이 어떤 스트레스로 인해 고장이 나, 온도를 높여야 하는데도 높이지 못하면 냉증이 생기고, 반대로 낮춰야 하는데도 낮추지 못하면 번열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율신경 실조 현상을 한의학에서는 음양의 부조화라고 합니다. 차가운 것은 음이고 뜨거운 것은 양이니, 음양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뤄야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지지 않겠죠. 그런데, 어떤 이유로 손발에 양기가 너무 몰려 흩어지지 않으면 번열증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동의보감》에서는 ‘오심번열(五心煩熱)이란 화(火)가 비토(脾土) 속에 몰려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즉 한의학에서 팔다리는 비장(脾臟)의 토기(土氣)에 속하는데, 심장(心臟)의 화기(火氣)가 비토(脾土) 속에 몰려서 퍼지지 못하기 때문에 가슴과 손발바닥에 번열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화기(火氣)가 사지에 몰려 퍼지지 않는 것일까요?
첫째는 찬 음식을 지나치게 먹거나 찬 기운에 침범을 당해, 이 차가운 기운이 양기(陽氣)를 눌러서 가슴과 사지에 몰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얼음과 숯이 섞이지 못하는 빙탄지간(氷炭之間)의 관계와 같은 것이죠.
둘째는 몸이 너무 쇠약해서 양기를 중화시킬만한 음기가 부족하니, 이를 틈타 열기(熱氣)가 계속 사지에 잠복해 있는 것입니다. 쇠약한 노인들이나 중병 후의 수족번열은 대개 이 경우에 속하겠죠.
▶ 수족번열 환자의 주의사항
1. 얼음물과 냉수를 피하라.
손발이 뜨겁다고 얼음물에 손과 발을 담그거나 찬물을 벌컥벌컥 마셔대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 강한 찬 기운이 들어오면 열기를 더욱 몰아붙여서 증상은 더욱 악화될 수 있습니다. 가급적 미지근한 물을 자주 마셔 뭉쳐진 열기가 은은히 풀어지도록 해야합니다. 씻을 때도 미지근한 물로 씻는 것이 좋습니다.
2.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
요가, 산보, 등산 등 사지를 움직일 수 있는 가벼운 운동을 꾸준히 해서 열기가 풀어지도록 해야합니다. 그러나, 땀이 너무 많이 나는 운동은 열기를 조장할 수 있으므로 피해야 합니다.
3. 수족번열증은 치료기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조급증을 가지면 증상이 더욱 악화될 수 있으므로, 장기간 건강을 위해 몸조리를 한다는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 수족번열의 지압요법
손바닥 번열에는 소부(少府)와 노궁(勞宮), 발바닥 번열에는 용천(湧泉)이 좋습니다.
소부(少府)는 12경락 중 화(火)의 경락인 수소음심경(手少陰心經)의 화혈(火穴)로 인체의 열 기운이 가장 모여있는 곳이므로, 이곳을 풀어주면 손바닥이나 발바닥의 열기가 해소되는 것이죠. 특히 스트레스나 화병으로 가슴에 울화가 모여 가슴과 손발바닥이 뜨거운 경우에 가장 특효 합니다.
노궁(勞宮)은 ‘피로가 모여있는 궁궐’이라는 뜻으로 과로와 스트레스로 몸이 쇠약해져 손바닥에 땀이 나면서 화끈한 경우, 피로를 풀어주는 동시에 뭉친 열기도 풀어주는 경혈입니다.
발바닥 중앙의 용천(湧泉)은 ‘물이 샘솟는 근원’이라는 이름과 같이, 양기를 중화할 만한 음기가 부족하여 손발바닥에 열이 나는 경우 우리 몸에 수분이 생기게 하여 열기를 식혀주는 효능이 있습니다. 삼음교(三陰交) 또한 그와 비슷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서, 가슴과 손발바닥의 모든 번열증에 쓸 수 있는 지압점입니다.
① 소부, 노궁 : 손가락을 가볍게 쥐었을 때 둘째와 셋째손가락이 손바닥에 닿는 사이의 오목한 점은 노궁이며, 넷째와 다섯째손가락이 손바닥에 닿는 사이의 오목한 점은 소부이다.
② 용천 : 발바닥을 오무려 ‘ㅅ’자가 생길 때 두 선이 만나는 점이다.
③ 삼음교 : 안쪽 복사뼈 위로 손가락 네마디 만큼 올라간 점이다.
▶ 수족번열에 좋은 처방
수족번열의 치료는 마땅히 사지에 몰려있는 열기를 흩어지게 해야 합니다. 《동의보감》에서는 ‘화가 몰린 것을 헤치는 데는 승양산화탕(升陽散火湯)이나 화울탕(火鬱湯)을 쓰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다. 음기가 부족한 경우에는 음기를 보강하면서 열을 식힐 수 있는 지백지황탕(知柏地黃湯)이 좋습니다.
♧ 승양산화탕 ♧
승마, 갈근, 강활, 독활, 백작약, 인삼 각 4g, 방풍 2g, 감초 1.6g
♧ 화울탕 ♧
강활, 승마, 갈근, 백작약, 인삼, 시호, 감초 각 4g, 방풍 2g, 흰 파뿌리 1뿌리
♧ 지백지황탕 ♧
숙지황 16g, 산약, 산수유 각8g, 목단피, 택사, 적복령 각6g, 지모, 황백 각4g
그리고, 여성들이 갱년기가 되어 가슴과 손발바닥에 열이 난다, 식은땀이 난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신경이 예민해져 자꾸 짜증이 난다고 할 때는 치료를 달리해야 합니다. 이는 여성호르몬 분비가 줄어들어 나타나는 증상이므로, 《동의보감》에서는 ‘혈(血)을 보(補)하고 비장(脾臟)을 강화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화(火)를 내리고 울체(鬱滯)된 것을 없애는 것을 겸하여 치료하면 된다.’ 고 하여 가미소요산(加味逍遙散)을 쓰라고 했습니다.
♧ 가미소요산 ♧
백작약, 백출 각4.8g, 지모, 지골피, 당귀 각4g, 백복령, 맥문동, 생지황 각3.2g, 치자, 황백 각2g, 길경, 감초 각1.2g